내심 나 자신이 보다 하얗고 고르게 변화되기를 바랬던 것도 같다. 고립된 삶의 방식을 추구하던 과거 어느 시점에서 부터 사회와 관계할 수 밖에 없는 현재의 어느 지점에 이르기까지, 정체성의 표피층은 끊임없이 제거되고 있었다. 이 것을 통하여 존재의 순수에 다다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불순물이라 여겨진 표피층을 벗겨낸 모습은 백색의 밀가루와 같이 유연성을 지닌 물질일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사실, 사회가 제시하는 보편을 부정하면서도 이미 메뉴얼에 맞춰져 재생산되어버린 나의 주체성을 방치시키고 있었다. 추구와 타협의 경계지점에서 일어나는 망설임과 혼란은 사회 속에서 보다 안전한 정체성을 가지기 위한 정제의 시간이었다. 보다 곱고 유연한 물성을 가진 존재로서 거듭나고자 표면층의 분리를 시도하였지만, 이러한 탈락의 결과가 수반하고 있는 것은 인식되지 못했던 또 다른 본연의 모습일 뿐이었다. 허무함이 들었다. 보편이 절대의 가치로서 통용되는 사회에 대한 반감이 무의미하게도, 내가 찾고 있던 순수는 일반화된 형상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내가 부정하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추구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왜 순수성은 백색의 형상일 것이라 생각했으며 그 것에 대한 갈망은 무엇을 위함이었을까?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부정하던 것은 나를 부정한다 여기게 되었던 사회였었고 그러한 경계에서 나 자신이 사회적 역할에 있어 제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관념이 생겼던 것 같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히려 거부의 대상이 나 자신으로 향하게 되었고, 정제를 통한 본연의 모습이 사회적 관념에 따른 미(美)의 기준에 부합되기를 지망하고 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정하는 것들에 대해 익숙해지면 관점과 감각의 골조는 부정하던 대상의 구조와 닮게 되는 것 같다.  

탈락된 표피의 무게를 가늠해보자니, 본연의 순수는 내어질 때 마주하는 것이 아닌 채워짐의 모습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것 같다. 보편의 정의가 맹목적 가치로서 정해지는 것이 아닌 사회를 반영하는 유기적 개념이듯, 경계에서 일어나는 정제의 시간 또한 사회의 관계적 부분과 밀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추구와 타협 혹은 불순물과 순수와 같은 경계는 더 이상 선(線)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내면의 관계에서 풀어나가야 할 어느 접점들로서 마주하게 될 것 같다.

<정제 精製 > 02.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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